Nari

010

카테고리
작성일
2022. 1. 12. 02:22
작성자
B43KS2

 

첫 인상은 형편 없었다.

 

새로 뽑은 알바들이라며 관리를 떠맡긴 제 상사에게 오늘도 주머니 속으로 가운데 손가락을 올려가며 세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온갖 잡일을 위해 뽑았는데, 왜 또 그 온갖 잡일의 뒤치다꺼리를 제가 하고 있는 그림이 벌써 상상되는지 까마득했다. 그중에 몇몇은 현장직 쪽으로, 남은 몇은 공식계정 관리따위를 인수인계해주면서도 세일은 바쁘게 현장을 누비고 다녔다. 나 FD라고, FD는 이런 시답잖은 일까지 안 한다고...! PD가 따로 있는데 왜 내가 더 뛰어다녀야 되는 거야? 이런, 아, ... ...!! 바쁜 와중에 체력도 그닥 좋지 않았던 세일은 뛰어다니며 욕하기에도 숨이 찼다. 그러다보면 꼭 부딪히는 사람이 있었다.

 

 

 

"-..."

 

"어우,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또 이 사람이네.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쳐다보면 늘 미안하다는 듯 쳐다보면서도 그냥 제 품 안에 있는 각종 소품을 꼭 끌어안고서 발길을 멈추지 않는 사람이었다. 잠깐 눈이 마주치더니 이내 포르르 가버리면서 도대체 어디가 미안하다는 건지, 표정을 보면 또 뭐라고도 못하겠고. 세일은 늘 이 사람만 보면 짜증일지 모를 어떤 감정이 올라왔다 사라졌다. 현장이 이렇게 바쁜데 남 생각을 길게 할 겨를이 없었다. 바빠서 봐준다. 암만 PD한테 깨지는 FD라고 알바들도 그닥 자신을 높게 보고 있지는 않지만, 알바 한 명을 구박할 정도의 지위는 됐다. 그럼에도 그러지 않는 이유는 똑같은 사람이 되기 싫어서. 이럴 시간에 빨리 뭐 하나 더 끝내고 쉬고 싶어서. 내가 피곤해서. 그래, 바빠서 봐주는 거라고 치자.

 

 

 

"..."

 

"...?"

 

"뭐예요? 말 걸지도 말고 그냥 지나가라?"

 

 

 

가뜩이나 안 좋은 스탭 처우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고 자조하는 만큼, 그런 스탭복도에서 자주 부딪히니까 어깨를 비스듬히 틀어 길을 틀어준 것 뿐이었다. 이 사람은 지금 제 나름의 배려랍시고 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못마땅싶은지. 혹시 그냥 나랑 닿기 싫어서, 는 아닌지. 그도 그럴것이 이... ...백나리 라는 대학생 아르바이트 스탭은 자신을 '알아본' 사람이었다. 자신이 먼저 나서서 꺼내지 않는 과거, 썩 유쾌해하지 않는 과거를, 그럼에도 아마 그때와 같이 기회가 주어졌다면 분명 참가를 마다하지 않았을 그때 그 시절을 아는 사람이다. 그러니 이제와서 자신을 피하거나 비웃는다 해도 익숙해 할 일이 맞다. 이미 그렇게 주변의 거의 모든 사람들을 모르는 사이로 돌려보냈다. 근데. 왜. 이렇게 열이 받지?

 

 

 

"비약이 심하세요."

 

 

 

정작 그 백나리는 누가 싫댔나, 그런 생각 한 적도 없구만... 꽁알대며 안 비키실거면 제가 먼저 지나갈래요. 하고 또 평소처럼 제 갈 길 가기 바빴다. 장세일은 유독 백나리의 뒷모습만 자주 본다 싶었다. 생각해보니 이렇게 제대로 된 대화를 주고 받은 것도 이번이 세 번째 쯤이나 될까? 처음은 베스타, 나온 적 있지 않냐며 물어봤었고. 두 번째는 방청 자주 왔었는데 기억하냐는 질문. 세 번째가 이번이었다.

 

게임은 원래 삼 세 판이라는데 세일은 세 번 다 자신이 진 것 같았다.

 

한국인 정말 3이라는 숫자 좋아하네... 그렇지만 나무도 열 번은 찍어야 넘어간다는데 제 마음은 왜 이렇게 금방 넘어갈 것 마냥 사람을 좋아하는지, 자꾸 희망을 품게 되는지 세일은 자기 자신에게 실망했다. 그러니까 지금 또 제 할 일을 잊어버리고 아직도 좁디 좁은 스탭복도에 혼자서 우뚝 서있으면서 내내 방금 있었던 장면같은 거나, 비켜주면서 저를 멀뚱히 한참이나 쳐다보던 눈 같은 것들을 되돌아보고 있다는 점들을 깨닫고 있자면 더욱 그랬다. 누가 먼저 해보자고 시작한 게임도 아니고, 참가여부도 불분명한데 벌써 시작도 전에 이미 기세가 기울어진 것만 같았다. 휘둘리는 느낌이 싫었다. 주도권을 잃고 휘청거리는 것에는 질렸다. 더 익숙해지다가는 자신의 새로운 만성 스트레스의 원인으로 자리할까봐 얼른 뭐라고 정의해두고 그만하고 싶었다.

 

백나리(동그라미 두어번 쳐져 있음), 하청으로 들어온 외주 알바, 성격 별로, 잘 모르겠음.

 

+ 별로. 알고 싶지도 않음! .

 

 

 

.

.

.

 

 

 

 

여전히 그런 일상들이 반복되길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방청석의 간이의자들 간격이랑 수용인원과 명단을 대조해가며 현장에서 즉석으로 구조를 조정하는데 막바지였을 쯤, 잘 없는 짬이 생겨 한숨 돌리고 있던 때였을 것이다. 아까부터 또 눈에 보일만한 거리에서 왔다 갔다 하길래 일거리 몇 개 쥐여주고 보냈는데 그걸 제대로 끝마치긴 한 건지 다시 시야에 걸리기 시작했다. 별 수 없이 갈기던 수첩을 닫고 고개를 드니 기다렸다는듯 다가와 아까 말씀하신거 어떻게 어떻게 했는데요. 네. 도중에 헤메팀이 와서 자기들 담당이라고 해서 저렇게 처리됐고요… 네, 알아서 하겠네요. 의자는 이게 다래요. 알아요. 알짱거리던 것과 달리 세일과 나리의 대화는 생각보다 담백했다. 진짜 이게 다인가 싶을 정도로.

 

 

 

"할 말 다 하셨어요?"

 

"네? 네."

 

"그럼 저쪽 가서 쉬세요."

 

"...아니, 잠깐만요. 다 안 한 것 같아요."

 

 

 

그럴 거면 네라고 대답은 왜 한건지. 이미 예상범위 안이었던지라 대강 듣고있다는 시늉만 할 뿐 세일은 별 말을 덧붙이진 않았다.

 

 

 

"저… 번호 좀 주세요."

 

"아. 뭐, ……예?"

 

 

 

나리는 주변을 슥 둘러보더니 내심 고심한 표정으로 터무니 없는 요구를 뱉었다. 이건, 이쪽은, 예상범위가 아니었는데. 세일의 입에서 얼빠진 소리가 나오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제는 제 핸드폰까지 내밀었다. 물론 호감이 있는 건 제 쪽이면서 상대한테 번호를 달라는 게 좀 무례할 수 있는 행동인 건 저도 아는데, 그렇게 드리고 뒤돌아서 스탭복도 쓰레기통 안에서 나뒹구는 제 번호가 적힌 쪽지를 혹시 제가 발견하게 되면 너무 슬플 것 같아서요, 그리고 가져가셔도 연락 안 주실 것 같구요…. 나리가 줄줄 내뱉는 말들이 어디 모 힙합 프로그램이라도 염두해본 적 있던 사람인가 싶을 속도로 이어지는 것에 세일은 약한 두통을 느꼈다. 진짜 골 때린다. 뭐 이런 사람이…. 황당함에 제대로 답도 못하고 쳐다보고 있자면 웃는 낯으로 다시 제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심연을 쳐다보면, 심연도 당신을, 이런 쓸데없는 생각들로 가득차서 일단 핸드폰을 건네받았다.

 

……핸드폰을 받았다고? 세일은 손에 들린 핸드폰을 보고 내색은 못했지만 속으로 기겁했다. 나 진짜 제정신인가. 이걸 왜 받아?! 어떻게든 상황을 무마하려고 했는데! 번호 키패드가 떠있는 화면을 한 번, 그리고 다시 나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제가 왜요?"

 

"이러실 줄 알았어요."

 

 

 

나름 저 답고도 타당한 답이 됐다고 생각했는데 상대인 나리는 그걸 또 그럴 것 같았다며 태연하게 받아쳐서 할 말이 없어졌다. 알면서 왜 이랬냐면, 제가 FD님을 알아가고 싶어졌어요. …그러니까 번호 좀 주시면 안 돼요? 제법 꿋꿋하게 말하는 것 치고는 이제 좀 보다보니 긴장한 기색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사소한 부딪힘으로 쌓인 인식이라 그런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됐다. 저를 왜요? 말을 하고 나니 아까랑 비슷한 어감이라 이 상황에 당황한 바보같이 보였을까봐 세일은 굳이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는 쪽을 택했다. 딱히 진심이 아닌 것도 아니고, 그리고 좀 더 단호해보였기를 바랄 뿐이었다.

 

단순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호감, 으로는, 뭐, 납득이 안 되시겠죠… FD님 성격이면. 나리는 이것도 이미 안다는 것 마냥 반쯤 체념한 듯한 목소리로 말을 흐렸다. 세일은 이쯤에서 조금 궁금해지긴 했다. 자신에 대해 이정도로 파악하고 있으면서. 첫인상도 별로였던 거 알면서. 그러면서, 이렇게까지 자신에게 호감을 구하는 건지. 말마따나 납득을 하지 못했다. 단순한 호기심이라고 본인이 대놓고 말하는 건 또 뭔가. 미묘하게 실망한 것 같은 기분이 들자 세일은 평소 하던대로 노선을 타기로 했다.

 

 

 

"그럼 굳이 연락처를요. 자주 불려나오시니까 얼굴 자주 보고 있잖아요."

 

 

 

그렇게 단순한 호기심이시면서 굳이 또 연락처까지 가야하냐는 투였다. 심지어 저는 님 번호 알아요. 알바들, 일용직 스탭들 관리 누가할 것 같아요? 설마 PD님? 덧붙이려던 말들을 머릿 속에서 혼자 곱씹다 그냥 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

 

 

"아, 굳이라뇨! 연락해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또 일부러 안 한 말들로 딱 막힐 대답만 내놓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분명 쉬는 시간인데도 일을 할 때보다 정신이 없는 것 같다. 그 덕에 뒤에 흘리듯이 아마, 하고 덧붙인 나리의 말도 눈치를 못 챈 것 같았다. 세일이 자신 생각으로 심란하다는 걸 알면 기뻐할 텐데, 당연히 이를 나리가 알 리가 없다. 본의 아니게 자꾸 봐주고 있네…. 슬슬 휴식시간도 끝나갈 타이밍이었고, 이 다음 할 일들이 밀려오면 세일에게 있어서 이 번호 사건 정도야 별로 심란하게 만들지도 않을 것 같았다. 아이씨…. 용케도 화면이 꺼지지 않은 상태로 꿋꿋하게 번호 입력창을 띄워둔 핸드폰마저 세일을 은근히 설득시키기라도 했는지, 괜히 나리쪽을 한 번 흘겨보고는 빠르게 키패드를 두드려 밋밋하고 딱딱하기 짝이 없게 '장세일 FD'로 저장까지 하고는 떠맡기듯-원래 나리 핸드폰이니 떠맡기는 건 아니긴 하다- 나리에게 넘겼다.

 

 

 

"저 이거 고백한 건 아니에요."

 

"안 물어봤어요."

 

"혹시 오해하실까봐."

 

 

 

어쩌라고…! 속으로만 생각하고 세일은 한숨을 대신 내보냈다. 다시 생각해보니 일을 하다가 심란해지면 다 이 일 때문일 것 같아졌다. 저지르고 후회하는 거 이미 몇 번은 겪어봤고, 겪어서 지금인 걸 알면서 왜 매번 이러는거냐, 장세일….

 

정말 다행이게도 이 다음 눈 감았다 뜰 시간도 없이 바빠져서 곧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까지 일을 하느라 달렸다는 거다. 그 전까지 백나리 생각은 나지도 않았고, 지하철을 타고 비척비척 집 앞에 서서 도어락을 힘주어 눌러 문이 열린다는 경쾌한 벨소리와 함께 제 핸드폰에서도 진동이 울렸다.

 

 

 

▶ 안녕하세요! 아까 연락처 받아간 백나리예요.

▶ 아까는 바빠보이셔서, 방해될까봐 퇴근하셨을 시간에 연락 남겨요.

▶ 물론 저도 지금 막 집에 도착해서요….

 

 

 

그러셨겠죠. 소리로 답해봤자 상대는 듣지도 못하는데 세일은 굳이 중얼거렸다. 당연하지. 같은 촬영장에서 일했는데. 답장은, 굳이 지금해야하나, 아… 읽음 뜨네 이거. 혼자 궁시렁거리곤 짧게 앓는 소리를 냈다가 일단 저장부터 했다.

 

 

백나리, 010-………. 잘… 모르겠음. 이상함.

알게 될 것 같음.

 

 

 

 

 

 

-

 

그냥 언젠가는 써야지 했던...

 

서사라고 해야할지... 관계의 시작점이 되는 그 번호따는 부분...

뭐랄까... 다 커미션 맡겨도 되지만 이 부분만큼은 내가 풀어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해서

ㅋ.. 아무튼 그래요..

모르겠다...

 

얼비님 커미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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